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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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한 국내 진보 정치인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그를 동행한 일이 있다. 노르웨이 정치인을 만난 자리에서 그가 받은 첫 질문은 “한국이 민주국가냐”였다. 국내 노조 탄압 소식이 노르웨이 좌파 정계에 잘 알려지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되는 질문이었다.이 질문에 대한 국내 정치인의 답은 대단히 현명했다: “한국은,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향해 발전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왜 현명한 답이었는가? 진보 정치인이 국내외에서 합법적 활동을 한다는 것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존재를 의미한다. 진보가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긴 싸움을 한다는 것은 한국 정치의 지속적 “발전”을 뜻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오늘날 한국을 명실상부한 “민주국가”라고 부르기에는, 민(民)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뚫어야 할 벽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민주의 기반은 정치참여다. 정치참여의 가장 기본적 방법은 투표인데, 국내 투표연령은 세계 평균인 18세에 비해 한 살 높은 19세다. 오스트리아 같은 일부 선구적인 국가들은 투표연령을 아예 16세로 낮추어버렸지만, 국내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국내의 보수적 “주류”에게 10대 후반의 시민들은 아직도 훈육 대상인 “아이”지 정치의 주체는 아니다.

투표는 정치참여의 시작이지만, 본격적 정치참여는 대개 정당활동을 의미한다. 정당활동은 모든 시민들의 고유 권리이지만, 국내에서 교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은 이 권리를 박탈당했다.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는 변명일 뿐이다. 프랑스나 캐나다 등 정통 민주국가들도 공무원의 정치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업무수행에서는 공무원 개인의 정치적 의견 반영을 금지하지만, 공무원의 정당활동을 금지한 적은 없다. 공무원은 “공무원”이기 전에 남들과 똑같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이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등 “민주국가”라고 부르기 어려운 일부 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공무원 정치활동 금지”를 시행하는 한국은, 공무원을 무력화시켜 기득권층의 수족으로 만들려 한다는 의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면 공무원들이 가입하고 싶어도 가입이 불허되는 진보정당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시행된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치판도 하나의 “시장”인데, 경제가 몇 개 안 되는 거대 재벌에 독점돼 있는 한국에서는 정계도 “재벌”급 강력한 극우, 온건보수 정당에 사실상 거의 독점돼 있는 상태다. 중소기업이 늘 재벌의 횡포에 노출돼 있듯이, 비정규직, 청년, 저소득층 등 소외계층들의 이해를 표방하는 진보정당은 언론으로부터 외면만 받고 온건 보수 정당으로부터 공직 선거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를 위해 후보사퇴 해달라”는 압력을 받곤 한다.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약자들을 위한 정당이 늘 스스로 약자로 전락하게 돼 있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과거의 망령이 산 자를 괴롭힌다고나 할까? 30년 전에 신군부가 제정하고 그동안 역대 온건 보수 정권들이 뜯어고치지 못한 공무원 정당 가입 금지 사항을, 지금 극우정권이 이용해 자신의 시민권을 살리겠다는 “죄”밖에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교사·공무원들을 무더기로 파면시키는 곳은 “민주국가” 대한민국이다.

1990년대 초반 학계에서 유행했던 말대로 이 “민주주의”는 일종의 “저(低)강도 민주주의”, 즉 실질적으로 기득권층을 위해 다수의 피지배자들을 포섭·동원시키는 외형적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저강도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거듭나려면, 우선 장시간·고강도의 살인적 노동에 건강을 잃어가면서 살만한 집 한 채 얻지 못하는 소외대중의 목소리는 정계를 제대로 강타해야 할 것이다.

by 쿠리다쿠리 2010. 8. 14. 20:44